일본인이 본 한국인의 역사 인식의 문제점



목 차
일제 수탈사관
제국의 후예
일본 역사교과서 비난
다케시마
종군위안부
일독 비교론
한국원조론
한말 외국인 기록
정신적 승리법
조선 통신사
식민사관
천황 백제인설
 이 페이지는 한 늙은 일본인과 젊은 한국인의 대화로부터 태어났다. 그 과정에서 일본인이 느낀 것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역사인식의 차이가 크고 일본측 논리를 설명하기에 예상외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미리 일본측 논리를 제시해 두면 한국인들이 그에 대한 반론을 준비하는 것부터 출발할 수 있어 낮은 차원의 논의를 생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아래는 늙은 일본인이 모은 한국인을 논파하기 위한 논거와 자료를 정리한 것이다. 일본인을 논파하려고 하는 한국인은 여기서부터 출발하기를 바란다.


늙은 일본인의 페이지
http://www7.plala.or.jp/juraian

젊은 한국인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kt87


일제 수탈사관


 한국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사상 드물게 보는 극악무도한 것으로, 가혹한 수탈과 학살에 의해서 사람들은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고 되어 있다. 이 '정치적으로 올바른'견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이의를 제기한다면, 유태인에게 대량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만큼 격렬한 반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사회적 제재를 각오하고 굳이 이의를 제기하는 한국인이 끊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이 정통사관의 수상쩍음을 시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멱살잡힌 ‘과거사 공청회’ [경향신문 2003/11/2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0041579

이영훈교수 '나눔의 집' 사과 방문 [연합뉴스 2004/09/0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754525

한승조교수 日잡지 기고 파문 [경향신문 2005/03/0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110392

조영남 “日신문 발언 사과” [경향신문 2005/06/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2&aid=0000127047

 일제 수탈사관의 원천은 물론 국사 교과서이다. 중학, 고등학교의 국사 교과서에서는 17 세기 이후 조선왕조에서는 농업 생산력의 향상, 상품 경제의 발전, 도시화와 수공업의 발달, 전국적 유통망의 형성과 화폐 경제의 보급과 같은 자본주의의 맹아가 순조롭게 자라고 있었다고 기술된다. 한편 일제시대에 대해서는 토지, 임야, 어장, 광산이 닥치는 대로 약탈되고 민족자본이 압박받아, 쌀 수탈 때문에 기아가 만연했다고 쓰여진다. 식민지로서는 전대미문의 중화학공업의 유치마저 반도를 병참기지로 만들고 조선 경제를 한층 종속시키는 악랄한 의도로 행해졌다고 기술된다. 이러한 기술의 배후에는 획실하게 반일 이데올로기가 있어, 이 교과서를 읽은 학생들은 조선 후기의 자생적 산업화의 성과에 자부심을 부풀리는 반면, 그것을 악랄한 수단으로 강탈해 파괴한 일제에 증오를 더해가게 된다.

 이러한 정통사관은 ”자본주의맹아론”이라고 불려 해방후에 일본인의 ”정체성론”에 대항하기 위해서 생겼다. 맹아론의 주장은 개항 이전 조선에서는 자생적 산업화의 싹이 자라고 있었다는 것이지만, 그러한 결론은 민족주의에 의해서 선험적으로 요청된 것으로, 사실에 의해서 증명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맹아론자들은 전통 조선사회에 자본주의의 맹아를 발견할 수 없으면 민족적 자존심에 상처가 된다고 하여 필사적으로 허무한 노력을 계속했다. 미국의 한국사학자 에커트(Carter J. Eckert)는 그러한 시도을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는 부질없는 노력" 이라고 일축했다.

전상인 “한국의 식민지 근대화” [기간 전통과 근대 10, 1999]
http://www.jontong.co.kr/99win/10s_2.htm

 한국 역사학계에서 맹아론을 대신해 1990년대부터 세력을 늘려 온 것이 ”식민지근대화론”이다. 안병직은 식민지시대를 수탈 일변도가 아니고 ”침략과 개발”이란 양면으로부터 파악하는 것을 주장했다. 실증주의적 방법이 역사연구에 반입되어 식민지시대 조선은 높은 경제성장률을 유지해 상당수의 민족자본가가 자랐던 것이 나타났다. 이영훈들의 토지조사사업에 관한 연구는 수탈논자의 수치 날조를 선명하게 분쇄해 보여 정통사관에 큰 타격을 주었다.

이영훈, "국사 교과서 일제피해 과장됐다" [프레시안 2005/04/2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8055

 이리하여 학계에서는 근대화론이 세력을 늘렸지만 아직 교과서 기술을 바꾸기에는 이르지 않기 때문에 “다수의 비주류”라는 비정상적인 상태이다. 교육당국은 어디까지나 일제 수탈사관을 고집해 식민지근대화론을 인정할 생각은 없는 것 같다. 김완섭에 의하면 2002년판 국사 교과서에서는 “불법으로 탈취된 토지는 전국 토지의 약40%나 되었다”라는 기술이 삭제된 뿐, 토지조사 사업을 일제의 악랄한 수탈이라고 주장하는 기술은 변함없다고 한다. 그동안 맹아론자들은 수탈사관을 지키기 위해서 반격하고 있지만 유효한 타격을 주었다고 간주하기는 어렵다.

자본주의맹아론 식민지근대화론에 반격하다 [연합뉴스 2007/10/0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775069

 현행 교과서에서 식민지시대의 긍정적인 기술은 일절 허락하지 않는 태도는 역사 기술로서 분명히 편향된 것이다. 근대화론의 주장은 '침략과 개발'이란 양면을 다루어 편향된 점을 바로잡자는 것으로, 설득력이 있는 만큼 한국 사회에서도 일정한 지지를 얻게 되고 만다.

[노재현 시시각각] 대일 ‘조건반사’ 이제는 그만 [중앙일보 2008/11/06]
http://blog.joins.com/media/folderlistslide.asp?uid=h125se&folder=1&list_id=10196235

 더 큰 문제는 자본주의맹아론와 같은 민족주의 사관은 국내용일 뿐 국외에서는 전혀 평가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위에 말하는 에커트와 마찬가지로 커밍스(Bruce Cumings)도 분명 근대론화자로서 식민통치의 긍정적, 부정적 두 측면을 지적하고 있다. Korea's Place in the Sun (2005)로부터 인용하겠다.

Politically Koreans could barely breathe, but economically there was significant, if unevenly distributed, growth. Agricultural output rose substantially in the 1920s, and a hothouse industrialization took root in the 1930s. Growth rates in the Korean economy often outstripped those in Japan itself; (p. 148)

Shortly after the Japanese took over, the traditional landholding system was put on a modern or rational-legal basis through new contract laws and a full cadastral survey. This was "the most ambitious and important task attempted by the Japanese" in the first decade of their rule, taking nine years and 20 million yen to complete. Now contractual property rights solidified the hold of yangban landlords who knew how to get their land registered, but led to the dispossession of traditional tenancy rights and land rights for many illiterate peasants. (p. 152)

 식민지 근대화론을 싫어하는 박노자조차 수탈사관의 한심함에 대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다.

식민지 개발론이 고개든 이유 [한겨레 2005/05/0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0110332

 원래 식민통치를 하는 측이었던 구미 선진국에서 보면, 식민지화에 따르는 혜택이 존재한 것은 자명하고 구식민지가 “수탈 밖에 없었다”라고 주장해도 "무슨 이상한 소릴 하는 거야"하고 생각할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미국 교과서가 식민지근대화론에 따른 기술을 하는 것도 당연하고 ”왜곡”이라고 부르는 것은 맞지 않는다.

미국 교과서에 실린 한국 역사 왜곡 자료
http://cafe.naver.com/history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4

 한국정부가 국외에서 전혀 대접바들 수 없고 국내에서조차 소수파에 전락한 일제 수탈사관을 고집하는 것은, 그것이 반일 이데올로기를 유지하는데 필요하기 떼문일 것이다. 반일하지 않는 한국인이란 이미 한국인이라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단 하나 한국인이 명심해야 할것은 국외에서 수탈론을 주장해도 변인취급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국의 후예


 한국과 대만은 일본제국의 후예이다. 현재의 발전한 모습은 일본통치 시대의 유산을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특히 일본통치하 조선에서는 식민지라고 믿기 어려운 정도로 공업이 발전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참여했다. 이 때의 공업화 경험이 "한강의 기적"의 원동력이었다. 박정희정권은 1세대전 조선총독부가 수행해던 개발프로그램을 그대로 반복했다...

 이것은 에커트(Carter J. Eckert)가 쓴 Offspring of Empire (1991)의 결론이다. 2004년에 나오는 일본어판 서문에 의하면 한국에서 이 책이 일본통치에 대한 변명이라고 인식되고 번역 출판은 어렵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2008년에 한국어판이 나왔다. 이것은 한국이 언론통제국가가 아닌 것과 한국내에서 식민지근대화론이 세력을 얻고 있는 것을 동시에 말해준다.

제국의 후예, 카터 J.에커트 저/주익종 역 [푸른역사 2008/02/19]
http://www.yes24.com/24/goods/2830368

 커밍스(Bruce Cumings)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A Comparative Perspective"는 한국과 대만을 프랑스 통치하의 베트남과 비교함으로 일본의 식민통치가 얼마나 특이했던 것인지 말해주는 점으로 흥미롭다. 프랑스는 베트남 개발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통제하고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해서 큰 노력을 했다. 프랑스는 폭동이 일어날 때마다 군대를 출동시킬 뿐이었지만, 일본은 평상시에도 계속 농촌부에 침투하고 개발과 착취를 위한 통치장치를 마련했다. 프랑스는 끝까지 아무리 영세한 비즈니스라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점차 규제를 완화하고 조선인과 대만인을 개발에 참여시켰다. 에커트와 마찬가지로 커밍스도 식민통치의 부정적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다. 또 일본이 친절심으로 식민지를 개발해준 자선사업가가 아니었던 것은 자명하다. 그러나 식민통치의 유산이 있다는 것 또한 자명하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자신이 배우는 일제 수탈사관과 다른다는 이유로 커밍스에게 "당신은 잘못하고 있다"고 말했던 한국인이 있었지만 이것은 창피하지 않을까.

Bruce Cumings, “Japanese Colonialism in Korea: A Comparative Perspective,” 1997.
http://aparc.stanford.edu/publications/japanese_colonialism_in_korea_a_comparative_perspective/

 한강의 기적이 총독부 사업의 재현이었던 것은 큰 대일의존에도 나타난다. 1930년대와 같이 1960년대에도 대량의 자본과 기술이 일본에서 도입되었다. 1965년 일한 국교정상화로 일본은 합계 5억달러의 경제원조를 제공했다. 포항제철소,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 지하철1호선등은 이 자금으로 수행된 대표적 프로젝트들이다. 한국정부는 그 외에도 농림, 수산, 광공업, 과학기술, 사회자본등 온갖 분야에 이 자금을 투입했다. 개발독재노선이었던 만큼 개인보상에는 거의 돌리지 않았던 것 같지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는 한국인들이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물론 일본의 입장은 "법적책임은 없다"는 것이다.

<초점> 한일협정 문서 공개 의미와 파장 [연합뉴스 2005/01/1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85178

 일본의 대 한국ODA는 1990년까지 계속되었다. 부국이 옆에 있는 가난한 나라를 원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이 사실을 알아서 충격을 받는 한국인이 많은 것 같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원조 [NAVER지식iN 2007/01/28]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1302&docId=60967125&qb=7ZWc6rWt7JuQ7KGw&enc=utf8§ion=kin&rank=29&sort=0&spq=1

한국이 일본에게 원조받은것(사실인가요?) [NAVER지식iN 2008/02/07]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4&dirId=409&docId=34608929&qb=7ZWc6rWt7JuQ7KGw&enc=utf8§ion=kin&rank=2&sort=0&spq=1

 일본이 공여했던 기술도 수 없이 많았다. 삼양식품은 묘죠식품에서 무상 기술공여를 받고 인스턴트 라면을 제조했다. 야쿠르트는 일한 합작기업으로서 생산을 시작했다. 롯데백화점은 다카시마야에서, 현대백화점은 다이마루에서, 신세계백화점은 미쓰코시에서 전면적 운영지도를 받고 개점했다. 일본에 대한 기술 의존은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다. 제일제당의 비트는 라이온 톱, 하이트는 삿포로 흑맥주, 현대 그랜저와 XG는 미쓰비시 데보네아의 클론제품이다. 이러한 기술공여를 어떻게 평가할까는 한국인들이 결정할 것이지만 평가하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한다. 이런 의미로 "일본 감추기"는 역사왜곡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백화점은 ‘메이드 인 저팬’ [한겨레 2007/05/03]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206983.html

 이러한 "일본 감추기"보다 훨씬 더 악질한 것이 표절 제품이나 작품이지만 이에 대해서는 한국에서도 잘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일본이 구미의 것을 표절했던 적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은 언제까지 이런 일을 계속할 생각일까.

한국 '일본 과자 무단 도용'보도에 네티즌 씁쓸 [마이데일리 2005/01/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117&aid=0000002871

문광부추천도서, 알고보니 일본작가 글 ‘복사판’ [한겨레 2005/02/1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0099723

표절…지식 도둑질 일삼는 가요계 [뉴시스 2007/03/2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352236

일본TV 소품 아이디어 차용…‘붕어빵’이 웃을 오락프로 [경향신문 2007/04/2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2&aid=0000221807

[데스크 칼럼] 日베끼기와 신토불이 마케팅 [매일경제 2007/09/0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09&aid=0000619761

"한국이 SMAP를 도둑질했다" …日 난리 [뉴시스 2008/01/0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0711812

어느 로봇의 개명 [한겨레 2008/02/2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1940689

日 유명과자, 한국에도 다있다? [스포츠월드 2008/07/1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2&aid=0001972082


일본 역사교과서 비난


 한국에서는 일본이라고 하면 자동적으로 역사왜곡라는 단어가 연상되는 것 같다. 이 관계성이 너무나 강화되면 일본에 관한 일은 뭐든지 역사왜곡과 관계짓는 망상이 생기는 것 같다. 아래 기사를 쓰신 기자님은 상당히 중증인 관계몽상을 앓고 계시지만 지금은 정상적인 사회 생활을 보내신지 걱정스럽다.

역사왜곡 챔피온 일본 에이즈 환자 1만명 돌파 [헤럴드 생생 뉴스 2005/04/2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112&aid=0000006095

 그러면 한국인들이 소리높여 규탄하는 일본의 역사 왜곡이란 무엇인가. 고대사의 세세한 의견상위를 제외하면, 2005년 검정의 2대쟁점은 식민지 근대화론과 다케시마(독도) 문제였다. 일본으로서는 “일본 통치하의 조선에서 근대화가 생겼다”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다”라는 것은 아주 당연한 주장으로 역사 왜곡이라고 매도되는 것은 심외이다. 그렇지만 입장의 차이라는 항상 있는 법이고, 한국 언론이나 민간단체가 항의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다만 한국 정부까지 나오고 외교문제화해서 “일본은 한국의 입장에서 교과서를 써라!”라고 요구하는 것은 분명히 지나치다. 독립국이 자국보다 타국의 입장을 우선하고 교과서를 쓸 수 있을 리가 없고 한국 정부의 요구는 누가 봐도 과잉이다. 실제, 일본 정부가 타국의 교과서에 대해서 항의했던 적은 없다. 그러한 행태는 중국이나 한국과 같이 비정상적인 비해자 의식을 가진 나라만이 할 것이다.

 원래 국정교과서를 유지하는 나라가 검정제를 채용하는 나라로 향해 항의하는 것 자체가 우스꽝스럽다. 자기가 편협한 원리주의자라고 세계를 향해 홍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반일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명한 편향이 있기에 더욱 우스꽝스럽다. 편향한 교과서를 사용하는 나라가 비교적으로 균형을 잡힌 교과서를 채택하는 나라에 “우리의 편향된 시각에 따라 개악해라!”라고 명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 역사교과서가 비교적으로 균형을 잡히고 있는 것은 반일논설으로 유명한 NYT의 오오니시 기자조차 인정하고 있다. 한국의 손을 들어 주는 외국인(중국, 북조선 제외)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는가 싶다.

NYT "日 역사교과서 韓ㆍ中에 비해 균형" [연합뉴스 2005/04/17]
http://www.koreasea.net/news2005041701.htm

 추측이지만, 근년의 한국내 변화 때문에 한국인은 예전과 같이 절대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규탄할 수 없게 되고 있다고 생각된다. 노무현 정권은 좌파의 친북사관을 보급시키기 위해 고등학교에 근현대사 과목을 창설했다. 검정제를 도입한 의도는 잘 모르지만 아마 언론통제를 상징하는 국정교과서로는 운동권의 이해를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좌파의 입장을 대변하는 근현대사 교과서에 대해서는 당초부터 우파에 의한 비판이 끊어지지 않았다. 특히 2008년에 정권이 바뀌고는 우파가 공세를 더하고 이에 대해 좌파가 필사적으로 반항한다는 이념 다툼이 격렬해지고 있다.

[사설]편향된 근현대사 교과서 바로잡아야 [동아일보 2005/01/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281935

[사설] 일본 문부성 뺨치는 정부의 교과서 왜곡 노력 [한겨레 2008/06/1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8&aid=0001954666

“좌편향 근현대사 교과서 선정 막겠다” [중앙일보 2008/09/09]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1971119

[사설] 역사 왜곡에 군까지 끌어들이나 [한겨레 2008/09/1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OD&mid=sec&sid1=110&oid=028&aid=0001967000

[사설]대한민국 폄훼 역사교과서, 집필진 스스로 수정하라 [동아일보 2008/10/3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OD&mid=sec&sid1=110&oid=020&aid=0002000456

 국정교과서 밖에 없었던 시절이라면 한국인도 “우리 역사인식이 유일절대”라고 믿을 수 있었을지도 모르다. 그러나 현재는 무엇이 “우리의 역사인식”인가 애매하게 되어 버렸다. 지금 한국이 일본의 역사교과서를 비난 해도 “우선 자기의 역사인식을 정리하고 나서 와라”라고 말해질 뿐일 것이다.

 한층 더 한국의 반일 이데올로기를 위협한 것이 뉴라이트 대안교과서의 존재이다. 이 대안교과서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노골적으로 표방하고 정통사관인 일제 수탈론을 정면으로부터 부정한다. 무서운 것은 이 친일사관을 지지하는 보수원론도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채택되면 일본 교과서에 대한 2대논점의 하나가 없어져 버린다. 그리고 일부라고 해도 한 때의 일본 비난이 잘못이었던 일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일본인으로는 수모당하고 중국인으로는 전향을 비난당할지도 모른다. 한국의 반일 활동가는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규탄할 틈이 있으면 뉴라이트의 주장을 어떻게 압살할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뉴라이트’의 식민지배와 독재 예찬 [한겨레 2008/03/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OD&mid=sec&sid1=110&oid=028&aid=0001944817

[사설]역사인식의 지평 넓힐 뉴라이트 대안 교과서 [동아일보 2008/03/2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1948722

[사설] 시대착오 좌파 역사교육 바로잡을 '대안교과서' [조선일보 2008/03/24]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3/24/2008032401764.html


다케시마



 필자를 포함해 일반적인 일본인의 다케시마(한국명 독도) 문제에 대한 인식은 “시마네현에 속하는 무인도를 한국이 불법하게 점령하고 무엇인가 떠들고 있다“ 정도이다. 실제로는 쌍방의 주장이 서로 얽혀 복잡괴기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지만 잘 모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세부에 들어가지 않는다. 잘 아는 것은 한국인의 발화점이 낮은 것, 온 국민이 필사적인 것, 행태가 과격한다는 것이다.

 다케시마 문제에 관해서 한국인의 발화점이 낮은 것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분명하다. 2008년 7월의 소요의 경우 일본 문부과학성이 학습지도요령 해설서에 “북방령토와 같이 다케시마도 일본땅”이라고 명기한다고 발표했던 것이 계기였다. 일본인은 러시아 교과서에서 북방영토가 어떻게 쓰여져 있든 관심이 없고 실제 그러한 보도도 들은 적이 없다. 하물며 실효지배한 측인 러시아가 일본의 도발에 하나 하나 반응할 리가 없고 러시아 외무성이 “일본이 얼토당토않은 주장을 해 유감"이라는 짤막한 성명을 발표할 뿐이었다. 권경복 특파원이 말하도록 양쪽 모두 “흥분하는 쪽이 진다”는 원칙에 충실한 셈이다.

[특파원 칼럼] 러시아가 일본을 다루는 법 [조선일보 2008/08/05]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8/04/2008080467002.html

 그런데 한국은 실효지배하는 측이기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흥분하고 신문은 사설로 일본 비난의 강도를 겨루며, 일장기가 불타고 꿩을 죽인다는 큰 소란이 연일 보도되고, 정부는 주일대사를 소환하고 최대급의 항의를 하게 된다. 일본의 도발이라고도 할 수 없는 도발과 한국의 광기 같은 반발을 국제사회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공포에 빠진 개와 같이 짖는 한국인들을 보면 “자신감이 없기에 이럴까” “죄악감이 있기 때문인가”라고 상상하는 외국인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한국은 다케시마를 실효지배하고 있는 만큼 국제사법재판소(ICJ)에의 제소를 승인할 리가 없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너무 강경하게 “일본이 절대적으로 나쁘다” “한국이 절대적으로 올바르다”식으로 주장하면 “그렇다면 국제사법재판소에 가도 문제 없을 것이다”라는 반론에 힘을 더해 주는 결과가 된다. 실제로 일본의 산케이신문, 요미우리신문, 마이니치신문은 그러한 사설을 써던 적이 있어 이에 대해 일본인이 납득할 만한 답변은 듣는 적이 없다.

 진실은 한국인들이 국제재판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군사문제 전문가인 배진수는 "승소를 확신하기 어렵다"라고 했고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박춘호도 두 나라의 경험 차이를 우려했다. 조선일보는 “국제 홍보전으로 가면, 외교-경제-문화적으로 더 강력한 일본에 유리할 수 있다“라고 보고 국제법학자인 최홍배도 한국의 열세를 인정했다. 요컨데 한국은 국제재판은 물론, 그 이전의 홍보전에서도 열세를 인식하고 있어 불안하고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일본의 몇 안 되는 움직임에 격렬하게 반응하고 떠들썩하게 짖어대는 것도 일본에 질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日, 독도문제 유엔개입 겨냥"<군사문제전문가> [연합뉴스 2005/03/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942648

일본을 알아야 독도를 지킨다 [오마이뉴스 블로그 2006/07/26]
http://blog.ohmynews.com/cari/entry/%EC%9D%BC%EB%B3%B8%EC%9D%84-%EC%95%8C%EC%95%84%EC%95%BC-%EB%8F%85%EB%8F%84%EB%A5%BC-%EC%A7%80%ED%82%A8%EB%8B%A4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 일본도 강력 대응 [조선일보 2006/04/28]
http://www.chosun.com/politics/news/200604/200604280101.html

[기고] 독도와 붕어빵 [부산일보 2008/05/2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82&aid=0000178564

 이러한 공포심의 탓인지 다케시마 문제에 격앙하는 한국인의 행태에는 제정신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 많다. 2005년 6월에 서울의 지하철역에서 전시된 초등학생들의 그림은 한국의 반일 교육의 이상성을 온 세상에 알렸다. 특히 어린이 닮지 않는 심한 폭력성에 유럽인들은 혐오감에 얼굴을 찡그린 것 같다. 2008년 8월 서울의 일본 대사관앞에서는 일본의 국조라고 하는 이유로 꿩을 죽이는 퍼포먼스가 벌여져 다시 한국인의 비정상임을 세계에 알렸다.

Children's drawings in the subway!, How cute [AoG.2y.net 2005/06/13]
http://www.geocities.jp/bxninjin2004/data_room/05/cache/01/indexphp.htm

외국인들, ''한국인 반일 감정 지나치다'' [미디어다음 2006/09/12]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view.html?cateid=1046&newsid=20060912184010964&p=m_daum

Raw : Korean's Kill Pheasants Outside Japans Embassy Over Territorial Dispute. [Live Leak 2008/07/17]
http://www.liveleak.com/view?i=9fa_1216314802

Japan-S Korea island row escalates [Aljazeera 2008/07/18]
http://english.aljazeera.net/news/asia-pacific/2008/07/20087183593714312.html

 결론은 분명하다. 일본인은 다케시마 문제로 한국인을 설득하자고 결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단지 가끔 도발하면서 한국이 자멸하기를 기다리면 된다.


종군위안부


 2007년 6월 미국 하원에서 위안부 결의안이 채택된 것은 일본외교의 완패였다. 원래 부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신학논쟁에서도 "악마가 존재한다"라고 주장하는 측에 증명할 책임이 있고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하는 측은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정치적 논쟁이 되면 그런 변명은 통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패전 때에 수 많은 문서가 없어진 것이 분명한 만큼 "공식기록이 없다"라고 주장해도 설득력을 가질 리가 없다. 더구나 고노 요헤이 담화에 연구자까지 속박된다는 이상 사태가 있어 유효한 반론을 하지 못하고 완패했던 것이다. 억울하지만 현재 국제여론은 확실히 일본에 불리하다. 일본으로서는 한국측 주장의 기만성을 꾸준히 지적하고 조금이라도 만회할 수 밖에 없다.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이 위안부를 정신대와 의도적으로 혼동시키는 한국의 악질적인 조작이다. 역사적으로 정신대란 1943년에 창설된 원칙 14-25세의 여성들으로 구성되는 근로봉사단체를 말한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신대를 위안부와 혼동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12세 소녀까지 정신대에게 동원되었다"라고 신문에서 쓰면 독자들이 곧 성적학대라고 오해하고 큰 소란이 된다. 1991년 1월의 정신대 소동도 이렇게 일어났던 것이었다. 김완섭에 의하면 이 혼동은 위안부가 강제동원되었다는 오해를 심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악용된다. 정신대가 강제동원된 것은 사실이기에 위안부가 정신대와 동일하다는 암시를 계속 주면 자연스럽게 위안부도 강제동원되었다고 믿어가기 때문이다.

 위안부 개개인의 증언은 시간이 지나도록 흔들리는 경향이 있지만 이것은 안병직이 지적하는 "순결"과 "민족"이라는 조건에 맞추어 증언이 조정되기 때문에라고 볼 수 있다. 민족의 딸은 순결해야 하기 때문에 억지로 윤락여성이었던 과거를 부정하고 납치해 가는 악역은 이민족이 아니면 안 되기 때문에 억지로 일본군인을 등장시킨다.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증언에는 항상 수상쩍음이 팽배한다.

위안부와 요코이야기에 대한 한국사회의 기억 [연합뉴스 2007/05/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1651645

 김완섭이 지적하는 "가장 부당한 대우를 받은 위안부만이 증언한다"는 표본바이어스도 전체상 파악을 어렵게 한다. 증언이 하나라도 있으면 같은 불행한 여성들이 많이 있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 반면 순결한 여성을 일본인이 납치한 사례가 하나도 없었다고 증명할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종군위안부에 매춘부가 많았다고 증명할 수 있으면 비도한 사례가 드물었다는 인상을 남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행하게도(?) 이 점에 대해서는 현대 한국여성들이 일본측 논거에 협력해주고 있다.

"한국 유학생들, 濠섹스산업에 종사" [연합뉴스 2004/12/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864248

여성 8000명 미국서 `원정 성매매` [중앙일보 2006/06/21]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

한국여성들 `일본行 성매매' 극성 [연합뉴스 2007/03/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586264

원정 性매매 극성… 국가위상 흔들린다 [헤럴드경제 2007/08/2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6&aid=0000251341

'워킹 홀리데이' 악용해 원정 성매매 나선 여대생들 [스포츠서울 2007/10/3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3&aid=0000082235

일본 성매매 왜 몰리나 [한겨레 2007/11/2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220615

한국 성매매 여성들 해외로 몰려간다 [주간한국 2008/05/0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42&aid=0001938547

 한국에서는 위안부 강제동원에 대한 회의론은 안병직, 이영훈, 지만원등 뉴라이트 논객에 의해서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위안부문제에 관한 "정치적인 올바름"은 견고하게 확립되고 이것을 뒤집는 것은 일제 수탈사관을 부정하기보다 훨씬 어렵다. 김완섭의 "여성도 국방의무를 수행해야 하고 위안부형태가 바람직하다"라는 주장은 너무 과격하기 때문에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일본에 도움이 될 것은 북조선의 광기같은 언동일지도 모른다. 아래와 같이 믿기 어려운 주장이 계속되면 위안부 증언이 전체적으로 신용을 떨어뜨리지도 모른다.

"日 증거인멸 위해 수많은 위안부 학살" [연합뉴스 2005/04/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982373

"日軍 조선처녀로 ××× 만들어 먹여" [연합뉴스 2005/04/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987352


일독 비교론



 한국인은 일본의 전후 처리는 독일에 비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고 믿고 있는 것 같다. 유태인 게토에서 무릎 꿇은 브란트(Willy Brandt) 전수상의 사과가 항상 언급되어 거기에 비교하면 일본은 전혀 반성도 보상도 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된다. 구로다 가쓰히로에 의하면 일독 비교론은 원래 일본 좌파 언론에 의해서 주장되어 한국에는 1980년대에 도입되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독일이 홀로코스트의 개인 보상 이외에서는 특히 성실하지 않은 것이 밝혀져 일독 비교론이 주장되는 것은 없어졌다.

 난징대학살이나 731부대는 단순한 전쟁 범죄이지만 홀로코스트는 전쟁 범죄를 넘는 것이다. 나치스 독일은 개전 이전부터 강제 수용소를 운영해서 유태인 사냥을 실시했다. 그것은 아리아 민족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유태인등이 더러워진 피는 독일로부터 추방해야 한다는 매우 사악한 사상에 기반해서, 개전후 추방이 불가능하게 되면 조직적, 효율적으로 살륙해 갔다.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취급은 나치스 독일의 유태인에 대한 취급과는 완전히 다르다. 일본은 조선인을 황국신민화하고 노동력이나 병력으로 이용하려고 한 것이어 지상에서 말살하려고 했던 것이지 아니다. 물론 "학살하는 것보다 일본인으로 만드는 것이 더 나쁘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인의 자유이다. 그 다음에 유태인을 포함한 국제사회가 그 주장의 타당성을 평가할 것이다.

 독일이 개인 보상을 실시해 온 것은 오랫동안 분단국가로서 국가간 교섭이 진행되지 않았던 것과 홀로코스트가 너무 비인도적이고 보상을 지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피해자 개인에게 직접 보상금을 지불하는 방식은 제2차대전 후 처음으로 등장한 것으로 원래의 국가간 배상과 비교할 때 극히 변칙적이고 예외적인 방식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서까지 보상을 실시하는 독일의 자세는 높게 평가되었지만, 한편으로 통일 후도 국가간 배상을 계속 거부하고 있는 점은 비판되고 있다. 최근에도 독일이 전승국들으로부터 가끔 배상을 요구되고 있는 것도 그러한 불성실한 태도이기 때문에라고 볼 수 있다. 독일로서는 국가간 보상 대신 개인 보상을 하고 있는 것이어 양쪽 모두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일 것이다.

Polish parliament demands reparations from Germany
http://www.wsws.org/articles/2004/nov2004/pola-n06.shtml

Germany files suit against Italy on war reparations claims
http://january.unricmagazine.org/international-justice/185.html

 한편 일본은 분단국가이지도 아니고 홀로코스트와 같은 비인도적인 만행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상적인 국가간 배상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시 미국, 영국, 중국등은 일본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포기했다. 제1차대전 후 독일에 대한 과대한 배상금이 제2차대전을 일으켰다는 반성에서 재외자산의 몰수 이상의 배상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연합국측의 방침이었기 때문이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일본이 점령하고 피해를 주는 나라에 대해서는 2국간 교섭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일본에게 요구했다. 이에 따라서 일본은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한국등과 차례로 2국간 협정을 체결해 전후 보상 문제를 해결해 갔다. 이러한 일본에 대해 독일과 같은 개인 보상도 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독일의 2배 이상 지불하라는 말도 안 되는 부당한 요구이다.

Japan's World War II Reparations: A Fact Sheet
http://digital.library.unt.edu/govdocs/crs/permalink/meta-crs-13:1

 영어판 위키백과에 의하면 독일은 침략이나 전쟁 개시에 대해서 사과한 적이 없다. 반대로 2004년에는 독일 방문을 앞두고 엘리자베스 2세에 1945년 드레스덴 폭격에 대해 사과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결국 독일이 성실한 것은 홀로코스트와 관련하는 문제에 대해서 뿐이고 침략이나 점령이나 식민지배에 사과하는 예가 없다. 구식민지인 나미비아에 대해서는 2004년에 공식 사죄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량학살 행위에 대한 사과이다. 아마도 20세기 최초의 집단학살로서 유명하게 되었기 때문에 홀로코스트에 대한 반성이라는 자세를 일관시키기 위해 사죄했을 것이다.

Do Mention the War? [Deutche Welle 2004/10/22]
http://www.dw-world.de/dw/article/0,,1369321,00.html

War, Genocide and Memory. German Colonialism and National Identity
http://hsozkult.geschichte.hu-berlin.de/termine/id=5790

 독일의 나미비아에 대한 사죄는 구미 열강으로서는 희유인 예이다. 독일 이외의 구미 열강들은 현재에도 구식민지국에 대한 사죄를 계속 거부하고 있다.

'No UK apology' for colonial past [BBC News 2005/01/15]
http://news.bbc.co.uk/1/hi/uk_politics/4176805.stm

Algeria Marks WWII Anniversary with Call for French Apology [news.VOA.com 2005/05/09]
http://www.voanews.com/content/a-13-2005-05-09-voa29/396367.html

Dutch withhold apology in Indonesia [The New York Times 2005/08/17]
http://www.nytimes.com/2005/08/16/world/asia/16iht-Indo.html?_r=0

Venezuela's Chavez again demands Spain apology [Reuters 2007/12/11]
http://www.reuters.com/article/worldNews/idUSN1154953620071212

 결론으로서 독일을 본받으라고 하는 사람은 일본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하고 있다. 우선 조선인이나 중국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를 실시하지 않았던 것을 반성할 것. 지금까지 해오는 사과를 모두 취소하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상대국에 사과를 요구할 것. 전후 2국간 교섭을 모두 파기하고 점령지에 있던 자산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고 일본이 지불해온 배상금도 반환 받은 다음에 개인보상으로 전환할 것. 참으로 이상한 요구들이다.


한국원조론


 예전부터 한국인들은 일본의 전통문화가 모두 외래이고 독창성이 없다고 평가절하해 왔다. 김소운, 박경리, 이어령등의 주장에는 맞는 부분도 있고 역사왜곡이라고 비난 할 수 없다. 그겋지만 인터넷시대에 들어가면서 한국인들은 세계적으로 평가가 높은 일본문화를 닥치는 대로 한국기원이라고 주장하고 일본인의 분노를 사고 있다. 2009년 4월 현재 일본어판 위키백과에서 거론되는 일본문화에 대한 한국원조론은 다음과 같다.

검도, 검술, 사무라이, 무사도, 일본도, 거합도, 발도술, 유도, 다이토류합기유술, 도의 정신, 가라테, 스모, 닌자, 둔갑술, 이가류, 핫토리씨, 철쭉, 다도, 화도, 도슈사이 샤라쿠, 단가, 종이접기, 가부키, 마쓰리, 신위가마, 왓쇼이, 아시하라노 나카쓰쿠니, 이타루, 신사, 일본정원, 비단잉어, 쿠마모토성, 밑반찬, 우동, 두부, 소바, 일본주, 초밥, 생선회, 간장, 김, 샤브샤브, 일본소, 나가사키 짬뽕, 오징어 술병, 일본(국가), 일본(국호), 일본어, 가타카나, 만엽집, 만엽가나, 구다라나이, 경어,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 히미코, 천황, 오오진천황, 조메이덴노, 류큐(오키나와), 다케시마(명칭), 가마이시, 시마네, 큐슈, 대마도, 야마토정권, 고사기, 생태계, 왕벚꽃나무(벚꽃 전반), 일본개, 카메라 부착 휴대전화, 엔카

 이것들은 일본인이 보면 말도 안된 역사왜곡이다. 이에 대해서 한국어판 위키백과는 2채널등에서 혐한성향 일본인들이 떠들고 있을 뿐이라고 무시할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한국 유명 언론들이 보도하고 때로는 제목에까지 올려놓은 상황을 일부 혐한네티즌의 피해망상이라고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문화] 일본 최고 단가시인 ‘와카’ 명인 손호연씨 [조선일보 2003/03/12]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31270258

아무리 다르다케도… 일본어 조상은 한국어 [동아일보 2006/08/25]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364180

“우리 탈춤의 뿌리, 자존심 문제죠” [조선일보 2006/09/0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9/06/2006090660478.html

美식당가, 日정부 '일식' 인증추진에 코웃음 [연합뉴스 2007/03/1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etc&oid=001&aid=0001573343

간장은 한국이 원조 ‘일본간장 잡겠다’ [중앙일보 2008/06/04]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25&aid=0001957050

 일본어판 위키백과는 이러한 한국원조론의 배경에는 한국인의 자민족우월주의와 일본에 대한 모멸감정이 있다고 지적한다. 그 전형적인 예가 한국의 국사교과서이고 "한반도의 선진문화를 미개한 일본에게 가르쳐 주었다"등의 기술로 가득 차 있다고 한다. 또 원조를 따지고 집착하는 것은 한국인의 민족성이라고 하는 오명철 논설위원의 의견도 소개되고 있다. 더욱 조선에서는 사대주의 때문에 독자적 문화가 발달하지 않고 넓게 알려진 일본문화를 훔쳐 민첩하게 자국을 PR 하려고 한다는 설도 소개된다.

[횡설수설/오명철]元祖, 진짜 元祖 [동아일보 2006/10/2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0&aid=0000267630

사무라이, 백제 기원설"-영화 "싸울아비" 개봉 앞두고 한일 공방 [무카스뉴스 2001/12/05]
http://www.mookas.com/media_view.asp?news_no=1653

 여기서는 "일제잔재" "왜색"이라는 비난이 한국원조론을 조장할 측면을 지적하고 싶다. 전형적인 예가 격투기이고 검도나 유도의 지도자들은 일제잔재를 보호한다는 비판에 노출된다. 혹은 유파간 갈등에서 상대 유파를 일제잔재라고 비판해서 자기 유파가 더 순수하고 한국적이라고 주장한다. 로손(K. M. Lawson)은 이것을 "Colonial Death Touch"이라고 불렀다.

Martial Arts and the Korean Colonial Police in 1938 [K. M. Lawson 2008/04/25]
http://www.froginawell.net/korea/2008/04/martial-arts-and-the-korean-colonial-police-in-1938/

 대한검도회가 홈피에서 검도의 한국원조론을 주장한 것도 "일제잔재"라는 비판을 회피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검도의 한국기원이 공식견해가 되어 수 많은 일본인들을 분격시키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는 한국인도 있지만 대한검도회가 견해를 바꿀 가능성은 적을 것이다.

검도(kumdo)와 겐도(kendo)에 대한 많은 질문들에 대하여… [서병윤 2002/01/17]
http://www.kumdo.org/community/read.php?tb=col3&no=31&fid=22&p=10

현대 일본검도가 한국 것이라고요? [오마이뉴스 2008/08/05]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58078&PAGE_CD=12

 일본인이 보면 태권도가 일본 가라테의 한 유파인 것은 분명하고 최홍희가 일본에서 배운 송수관공수도가 바탕이 되었다. 사실 최홍희가 창설한 국제태권도연맹(ITF)은 태권도의 기원에 대해서 "가라테를 토대로 택견등을 연구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최홍희를 추방하고 창설된 세계태권도연맹(WTF)은 "가깝게는 택견으로, 멀게는 삼국시대의 화랑도와 수박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라고 하여 가라테의 영향을 부정했다.

 이에 반하고 이종우 국기원부원장은 "초창기 태권도는 가라테의 변형"이며 "자신이 일찌기 태권도의 뿌리는 삼국시대 이전에 거슬러 올라간다고 쓴 것은 거짓말"이라고 충격적인 고백을 했고 "죄 없는 사람은 돌을 던져라"는 벙어성 발언을 했다. 그런데도 WTF의 공식견해가 바뀌었다는 이야기는 듣지 않고 많은 지도자들이 아직껏 "Colonial Death Touh"를 피하는데 필사적이라고 볼 수 있다. 김영선강사의 요망은 요컨데 "더 설득력 있는 거짓말을 마련해라"는 것이다.

이종우 국기원 부원장의 ‘태권도 과거’충격적 고백! [신동아 2002/04]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200204/nd2002040010.html

공인 태권도 역사 정립에 따른 근본 문제 [태권도신문 2006/08/28]
http://www.tkd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36

 중국에서 한국원조론을 문제 삼고 역사도둑 취급을 하기 시작한 것은 2005년 11월에 강릉단오제가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록되고 나서였다. 2006년 5월에는 샹하이상보가 림균택 대전대 전부총장의 "내몽고, 산둥성, 푸젠성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영토였다"는 설을 소개해서 중국 네티즌들의 분노를 샀다. 10월에는 한의학을 둘러싼 중한 신경전이 있어 인민일보가 "고대 한국인이 한자를 발명했다"는 주장을 소개했다. 2007년 2월에 창춘 동계 아시안게임의 여자 쇼트트랙 시상식에서 한국선수들이 "백두산은 우리땅" 세리모니를 하면서 반한감정이 한층 격화했다. 7월에는 문회보가 "한국인이 시유천황의 역사를 왜곡"이라고 전하고, 12월에는 신쾌보가 한국의 역사왜곡에 관한 연재물를 실었다. 2008년 5월 쓰촨대지진에서 한국인들이 악플을 연발하면서 반한감정은 정점에 달해 중국 언론에서는 공자, 노자, 쑨원, 석가모니, 손문에 대한 한국원조론이 난무했다. 이 단계에서 중국 언론들은 넷 위의 소문을 확인도 하지 않고 실었고 조선일보나 동아일보가 한국원조론을 유포한 범인 취급을 받았다.

‘야유’ 퍼붓는 중국…‘반한감정’ 어디서 폭발했나 [한겨레 2008/08/27]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28&aid=0001964342

 당황한 재중국한국인회는 2008년 9월에 겸따마다운동을 시작했고 한국 언론들도 이것을 지원한 보도를 냈다. 일본에 대해서는 결코 겸손하게 될 수 없게 보인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서는 저자세가 될 수 있는 것이 흥미롭다. 이것은 무역에서 중국이 손님이고 일중관계가 호전한 가운데 고립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한국이 동북공정을 인정할 리가 없고 중한갈등은 불가피이다. 또 한국은 전통 있는 차이나타운이 없는 드문 나라이며 중국인들은 화교에 대한 차별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고 있다. 한편 아래와 같이 겸따마다를 지지하지 않은 한국인도 많다고 볼 수 있다. 이미 퇴영적인 포스트근대 단계에 들어간 일본과 달리 한국과 중국은 아직껏 근대 국수주의의 열광 한가운데에 있다. 그런 만큼 중한 국수주의의 충돌은 일중이나 일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될 전망이다.

중국의 반한감정, 우리가 어쨌다고? [프리존뉴스 2008/08/22]
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8743

한겨레 참역사 True History of the Han
http://youtube.com/watch?v=i2TiKMAnUek


한말 외국인 기록


 하멜(Hendrick Hamel)에서 드레이크(H. B. Drake)까지 구한말을 중심으로 한국을 방문한 서양인들의 저서를 번역출판해 온 사람이 건국대 신복룡교수이다. 한말 외국인 기록은 집문당에서 출간되고 있지만 매우 충실한 시리즈로 중요한 문헌으로 포함되지 않은 것은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의 "한국천주교회사" 정도다. 신복룡은 풀빛에서 본시리즈의 해설서도 내고 있다.

신복룡 교수의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풀빛, 2002년, ISBN-10 8974748746
http://www.yes24.com/24/goods/254268

 충실한 시리즈를 낸 수완은 높게 평가하고 싶지만 이 해설서에는 이상한 기술이 많다. 예를 들어 오페르트(Ernst Jacob Oppert)의 "금단의 나라 조선"을 소개하는 가운데 나오는 다음의 부분이다.

그는 한국이야말로 동양의 영국과 같은 나라요 민족적으로는 앵글로-색슨족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했다. (p. 53)

 그러나 "동양의 영국"이라면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 보통하다. 사실 신복룡자신이 번역한 집문당판 "금단의 나라 조선"에서는 "아시아의 영국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 (p. 147)라는 글이 있다. 조선인을 앵글로-색슨족과 비교하는 기술은 읽은 기억이 없다.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은자의 나라 한국"을 당쟁의 고유성, 이상성을 부정할 근거로 사용하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다.

이러한 자기모멸적 인식에 대해 그리피스가 설명한 한국 당쟁사는 많은 시사를 준다. 그는 결코 당쟁을 미화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쟁을 우리만이 가진 정치적 해악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다. 당쟁에 나쁜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원초적으로 정치라는 행태에서 빚어지는 악이지 한국의 당쟁에서만 유별나게 나타나는 형상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pp. 68-70)

 그러나 그리피스는 극히 초기의 조선 소개자이며 한문도 한글도 읽지 못하고 조선을 방문한 적도 없고 조선정치의 권위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조선 당쟁의 이상성을 지적하고 있지 않다면 단지 그것에 대해서 잘 몰랐기 때문에라고 생각할 것이 자연스럽다. 오히려 조선의 궁정 정치에 직접 관여한 서양인들의 의견이 참고가 될 것이다. 헐버트(Homer B. Hulbert)는 "바로 이 당쟁이야말로 일본의 침략에 대해서 별다른 저항을 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원인이다"라고 썼다. 알렌(Horace N. Allen)은 "조선 사람들은 음모의 명수이며 어머니의 젖꼭지를 물고 있을 때부터 음모를 꾸미기 좋아하는 것 같았다"라고 썼다. 샌즈(William F. Sands)는 "왕실은 게으르고 한자리 차지하려는 배고픈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그들은 각 공사의 영향력을 자세히 지켜 보다가 그에 따라 예우를 했다. 더구나 신념이나 돈줄로 인해 공사와 관련이 있는 몇몇 고위 관리들을 주축으로 하여 파벌을 조성하는 일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라고 썼다. 모두 신복룡자신이 번역한 시리즈에 포함되고 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에 관해서는 자기 연민에 의한 역사왜곡을 피하기 위한 외국인 기록의 효용을 강조하고 있다.

역사 학자들이 범하기 쉬운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아마도 자기 연민과 그로 인한 사실의 호도가 아닐까 생각된다. …… 특히 당대를 살았던 외국인들의 현장 목격담은 우리의 편협한 국수주의로부터 역사학을 해방시키는 길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허물이나 잘못된 가치관을 성찰하는 좋은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 번역하여 소개하는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도 그러한 범주에 드는 좋은 사료 중의 하나이다. (pp. 120-121)

 아주 훌륭한 설이지만 신복룡자신이 이것을 실천한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조선이 독립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러시아나 일본의 보호국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비숍의 결론에 언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문당판에서 비숍의 주장을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번역하면서도 그 내용을 이해하지 않았던 것일까.

I felt Korea to be hopeless, helpless, pitiable, piteous, a mere shuttlecock of certain great powers, and that there is no hope for her population of twelve or fourteen millions, unless it is taken in hand by Russia, under whose rule, giving security for the gains of industry as well as light taxation, I had seen Koreans in hundreds transformed into energetic, thriving, peasant farmers in Eastern Siberia. (원서, p. 330)
나는 조선이 희망 없고 무기력하고 한심스럽고 애처로운 존재이며 어떤 큰 힘에 의해 통겨 다니는 배드민턴의 공과 같은 사람들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나는 동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정열적으로 노력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조선의 농민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이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 낮은 세금과 생업의 보장을 받지 않는 한 1,200~1,400만의 조선 사람들에게는 희망이 없다. (신복룡역, p. 322)

Korea, however, is incapable of standing alone, and unless so difficult a matter as a joint protectorate could be arranged, she must be under the tutelage of either Japan or Russia. (원서, p. 457)
그러나 조선은 혼자 힘으로 지탱될 수 없으며, 그러한 어려운 상황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조선은 일본이나 러시아의 보호 하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신복룡역, pp. 432-433)

 이들은 정확한 번역이지만 오역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개소가 하나 있다.

As Korea is incapable of reforming herself from within, that she must be reformed from without. (원서, p. 452)
조선 내부로부터의 개혁이 불가능할 때, 외부로부터라도 개혁되어야 한다. (신복룡역, p. 429)

 이 "As"은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라고 볼 것이 자연스럽고 "조선 내부로부터의 개혁은 불가능하기 때문에"라고 번역해야만 올바르다. 사실 일본어판은 도키오카 게이코역도 박상득역도 그렇게 되고 있다. 신복룡은 여기까지는 정확하게 번역해 왔지만 마지막에 자기 연민에 빠져 사실을 호도해 버린 것일까.

 한국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러한 책들보다 덕성외고 박건호교사에 의한 다음의 사이트가 유명할지도 모른다. 모 번역게시판에서 자주 올려지고 있었지만 번호를 남긴 채로 올렸기 때문에 어느 강목이 생략되었는지 역력하고 있었다. 역시 #7, #8, #9, #24, #25, #28과 같은 부정적 평가가 생략되는 것이 많았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100년 전의 조선
http://www.happycampus.com/doc/11332117/?agent_type=naver

 이 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도 비숍의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이지만 다음의 2개소는 분명한 오역이다. 신복룡역에서는 각각 "일상적인 표정은 약간 당혹한 듯하면서도 활기에 차 있다" "나는 하루 종일 옷을 세탁하고 물을 긷는 하층 계급의 여인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라고 되고 있다.

The usual expression is cheerful, with a dash of puzzlement. (원서, p. 13)
한국인들의 일상적 표현은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활기차다.

I have mentioned the women of the lower classes, who wash clothes and draw water in the daytime. (원서, p. 47)
한국에서는 여성들 모두가 최하층계급의 일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비숍의 문장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발췌가 있지만 역시 자본주의맹아론과 모순될 개소를 피한 것이 아닐까 상상된다. 예를 들어 서울 성외의 아름다운 풍경을 칭찬한 부분을 실으면서 성내의 불결함이나 상업의 정체성를 비판한 부분을 피하고 있다. 신복룡역에도 문제가 많기 때문에 역시 원문을 읽어야 한다. 아래의 사이트에서 다운로드할 수 있다.

American Libraries Internet Archive
http://www.archive.org/details/koreaherneighbor00bird


정신적 승리법


 일본은 외래 문물을 모방해 개량하는 것에 뛰어나다. 유익하다고 생각하면 재빠르게 외래 문물을 받아들여 변형하고 개량하고 일본화해 간다. 이러한 일본의 "모방문화"과 달리 한국은 외래 문화를 받아들여 일 점, 일 획도 빼거나 더하지 않는 "복사문화"이다는 것이 김영복의 주장이다. 그러나 사실은 한국은 외래 문물을 극단화하고 개악하는 경향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전형적인 예가 이씨 조선 시대의 성리학과 소중화사상이다.

일본 모방문화와 한국 복사문화 [경남도민일보 2008/02/14]
http://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244655

 성리학은 군사적 패자의 정신적 승리법이다. 금나라에 압박받는 남송의 현실 인식을 거부하고 명분이 지배하는 "있어야 할 세계"에 연연했던 주희의 원한이 조선 선비들의 마음을 잡았던 것일까. 이씨 조선 지배층은 과격할 정도로 주자학의 예의를 민중에게 강요했고 세골장이나 화장을 금지했고 무녀나 승려를 탄압했고 과부의 재혼을 금지했다. 이렇게 해서 명나라에 사대 하면서도 명나라보다 중화의 예의를 지키고 있다는 자부심을 길렀고, 이러한 소중화사상은 청나라의 성립에 의해서 확고하게 되었다.

 이씨 조선은 철저히 문치주의였기 때문에 군사력은 약체였다. 분로쿠의 역(임진왜란) 때는 부산상륙 후 20일가량으로 한성까지 점령되었다. 진군이 너무 빠르기 때문에 조선이 일본군을 선도하지 않을까 명나라가 의심할 정도였다. 조선에서는 이 때의 반성에서 무술이 장려되어 일본식 도검이 제작되기도 했지만 효과가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병자호란 때 청군은 압록강을 건너 불과 일주일간에 한성을 점령했다. 김열규는 붓은 언제나 칼을 이겨왔다고 하지만 언제 어떻게 이겼다는 말인가.

[문화산책]붓은 언제나 칼을 이겨왔다 [세계일보 2005/04/1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2&aid=0000092063

 15세기 조선에서는 의학, 역학, 농학이 발달하고 우량계, 시계, 도자기, 인쇄술, 조선등 많은 분야에서 일본을 우월하고 높은 학문적, 기술적 수준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미 상공업의 전반적 수준이 일본보다 열세였다고 생각되는 근거도 발견할 수 있다. 세종12(1429)년에는 일본의 화폐경제나 시장제도가 조선보다 우수하다는 통신사 박서생의 보고가 있었다. 일본이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조총이나 도검등 병기 생산기술로 조선을 훨씬 우월하는 것은 역사가 증명하는 것이다. 강항은 "간양록"에서 근본주의적 성리학자답고 천하제일을 겨루는 일본인의 장인정신을 바보취급했다. 일찌기 중국인이 칭찬했고 일본인이 본받는 높은 도자기 제작 기술은 19 세기에는 소멸하고 있었다. 1886-89년에 육영공원의 교사였던 길모어(George W. Gilmore)는 다음과 같이 썼다.

도자기 만드는 방법을 일본에 가르쳤던 사람들이 강제로 일본으로 납치되어 갔으며, 이제 조선에서는 도자기가 잊혀진 예술이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는 것이 조선 사람으로서는 매우 분통 터지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으로서 떳떳한 것은 그 예술이 그들에게서 정체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사람들은 인내심 있는 일본인이 생산한 우아하고 정교한 제품을 결코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심할 나위도 없다. (G. W. 길모어 지음, 신복룡 역주, 서울풍물지, 잡문당, 1999, p. 166)

 구한말 경제적 황폐는 눈을 가가리고 싶어질 정도로 심했다. 이것은 19 세기에는 양반층이 증가해 노동을 기피하는 문화가 사회 전체에 퍼져 증가한 양반층을 기르기 위해 착취가 강화되어 사회적 부정이 횡행했고, 그것이 또 서민의 노동의욕을 빼앗는다는 악순환에 빠졌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비참한 모습을 한말 외국인 기록으로부터 몇개 발췌하겠다.

중국의 도시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색상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큰 사원은 서울에서 찾아볼 수 없다. 가옥들은 대개 진흙으로 지어진 단층집으로서 초라하기 때문에 결코 서울이 조선과 같은 나라의 수도라고 할 만한 인상을 주지 않는다. (E. J. 오페르트 지음, 신복룡-장우영 역주, 금단의 나라 조선, 집문당, 2000, p. 46)

조선 사람들의 산업 기술과 기량은 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에 비해 훨씬 못 미친다. 이렇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억압적인 정치 체제에 기인한다. (동서, p. 144)

일본 집은 모두 매력적인 반면에 조선 사람들의 집은 통풍 장치가 전혀 되어 있지 않고 냄새가 나는 도로변 양쪽에 제멋대로 지어 올린 초가지붕의 토담집들이었다. (W. R. 칼스 지음, 신복룡 옮김, 조선풍물지, 집문당, 1999, p. 28)

나는 부산이 처참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나는 그것이 조선 마을의 일반적인 모습이라는 점을 알았다. 좁고 더러운 거리에는 진흙을 발라 창문도 없이 울타리를 세운 오두막집, 밀짚 지붕, 그리고 깊은 처마, 마당으로부터 2피트 높이의 굴뚝이 솟아 있었고 가장 바깥에는 고체와 액체의 폐기물이 담겨 있는 불규칙한 개천이 있다. (I. B. 비숍 지음, 신복룡 옮김, 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집문당, 2006, p. 37)

나는 서울의 내부에 관해 서술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내가 복경을 보기 전까지 세상에서 가장 불결한 도시라고 생각했고 소흥(紹興)을 가 보기 전까지는 서울의 냄새가 가장 지독하다고 생각했다. 대도시인 수도가 이토록 불결하다는 것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2층집을 짓는 것이 관례로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25만 명으로 추정되는 주민은 주로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다. 비틀어진 소로(小路)의 대부분은 짐실은 두 마리 소가 지나갈 수 없을 만큼 좁으며 한 사람이 짐을 실은 황소를 겨우 끌고 갈 수 있을 정도의 너비이다. 그 길은 그나마 물구덩이와 초록색의 오수가 흐르는 하수도로 인해서 더욱 좁아진다. 하수도에는 각 가정에서 버린 고체와 액체의 오물로 가득 차 있으며 그들의 불결함과 악취 나는 하수도는 반나체 어린애들과 피부병이 오른 채 눈이 반쯤은 감긴 큰 개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 (동서, p. 50)

 황폐는 문화면에도 미쳤다. 이씨 조선은 폐불숭유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불교 건축이나 미술의 발전이 정체했고 차 마시는 습관이 없어지어 버렸다. 모처럼 한글이라는 독창적인 글자를 창출하면서도 사대주의 때문에 민족문학은 발달하지 않았다. 한글소설, 판소리, 시조등 민족문학이 전무이지 아니지만 한시와 한문소설에 밀려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중국, 일본 문학과는 비교가 안 된다. 경제적 정체성 때문에 연극이나 씨름이 상업화될 것은 없고 극히 초보적인 단계에 머물렀다. 이러한 문화적 빈곤이야말로 지금 일본이나 중국의 전통문화를 훔치는 한국원조론의 원인이다. 전통문화라는 현재까지 꾸준히 계속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복원된 다도나 검도에 가치가 없다.

 이렇게 해서 이씨 조선의 원리주의적 정책은 군사적 약체, 경제적 정체, 기술적 쇠퇴, 문화적 빈곤을 초래했고 민중에게 도탄의 괴로움을 주었고 마침내 망국의 원인을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도 이씨 조선 지배층은 행복했다고 생각된다. 그들은 일본은 물론 중국과 비교해도 도덕적으로 우월하고 예의가 지켜지는 나라를 만들어냈다는 정신적 승리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후손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통신사


 한국의 국사교과서에 의하면 임진왜란후 조선과의 교역이 끊어졌기 때문에 일본은 경제적 어려움을 겪면서 조선에 사과하고 국교회복을 애원했다고 한다. 이것은 대마번의 어려움을 일본 전체와 의도적으로 혼동하게 하는 악질적인 역사왜곡이다. 또 12회에 걸쳐 일본에 파견된 조선 통신사는 일본에 선진적인 문화나 기술을 전했다고 기술된다. 성리학이나 한시를 "선진적인 문화"라고 부르고 싶다면 개의치 않지만, 통신사가 어떤 선진기술을 전한 것일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문물의 흐름이 조선에서 일본으로의 일방 통행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측에 일본 문화나 기술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에 흘러간다라고 하지만, 낮은 곳에 문화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없으면 전파하자마자 사라져버릴 것이다.

 박서생(1429년 방일)부터 김인견(1764년 방일)까지 역대 통신사들이 일본의 양수용 수차에 감탄하고 조선에서도 사용하려고 했지만 보급할 수 없었다. 이것은 농민들의 무지몽매 때문에이기도 하지만, 기술수준이 너무 낮기에 제대로 된 수차를 양산할 수 없었던 것도 이유의 하나다. 박지원 "열하일기"에 "우리나라에도 전혀 수레가 없음은 아니나 그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 못하고…"란 글이 있지만 목재를 제대로 구부리는 기술도 없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선조들의 가뭄대책] 세종때 '水車' 개발 주력 [매일경제 2001/06/1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5&oid=009&aid=0000124979

 조선후기의 지적퇴폐는 무서운 정도이고 왜 여기까지 학습능력이 저하한 것인지 의심될 정도다. 신복룡이 개탄하듯 조선은 하멜(Hendrick Hamel)을 비롯한 네덜란드인 표류민들을 구경거리로 한 뿐 그들부터 아무 것도 배우려고 하지 않았다. 당시 조선에서는 북벌론이 논의되어 하멜들은 조선술이나 항해술은 물론, 포격이나 측량에도 능통한 기술자집단였는데 말이다. 일본이 조총을 순식간에 국산화하고 영국인이나 네덜란드인부터 대포 기술도 배운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에서는 18세기 초부터 난학이 융성하고 많은 서양책들이 번역되었다. 한편 조선에서는 한문역 서양서를 읽은 자가 약간 있을 뿐이고 원문을 읽으려고 시도한 사람이 한명도 없었다. 1882년에 미국과 수교통상조약을 체결했을 때도 서양어를 이해하는 인재가 전무했기 때문에 협상을 이홍장에게 다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강재언은 "서학 부재의 개국이 초래한 실로 참담한 결과"라고 썼다.

 조선 통신사의 실태는 탐적사이고 일본의 학문이나 문화의 실정도 보고해야 할 항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통신사 일행 안에 일본 사상계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가 한명도 없었다. 조선이 군사적, 경제적으로 낙후한 것은 너무 분명한 만큼 학문적 우월성을 확인해 자존심을 지키고 싶다는 심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학문은 조선보다 훨씬 늦다는 명제는 선험적으로 결정되고 있고 통신사 일행이 무엇을 보아도 그 결론을 바꿀 수 없었다. 아무 것도 조선 선비의 정신적 승리를 뒤흔들 수는 없었던 셈이다.

“18세기 조선통신사들, 일본사상 변화의 흐름 놓쳐” [조선일보 2007/07/30]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7/30/2007073001287.html

18세기부터 조선-일본 학문 역전? [중앙일보 2008/07/25]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237902&ctg=17

 "일본을 일방적으로 가르친 조선 통신사"라는 말는 사실이지만, 그 이유는 일본은 배울 수 있고 조선은 배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학습능력의 결여를 자랑한다면 현대한국인도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식민사관


 식민사관이란 일본인에 의한 조선사 가운데 한국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다.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과 같은 식민사관은 전후 한국, 북조선의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그러나 그 부정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성토"되는 뿐이고 새 사료를 내 와 실증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식민사관의 극복이라는 것은 국내만의 일로 세계의 한국사 학자들이 그러한 민족주의사관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식민사관의 제1은 일선동조론이고 원래 일본인과 한국인은 같은 민족이라는 주장이다. 왜 이것이 한국인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하면 그 중심에 고대 일본이 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일본에서도 일본서기 기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없어져 임나일본부설은 크게 후퇴했다. 그러나 일본의 군사적, 문화적 영향을 나타내는 자료는 일본서기 뿐이 아니다. 그 하나가 광개토왕릉 비문이고 고구려에서는 백제나 신라가 일본의 신민으로 보였던 것이 새겨지고 있다. 이에 대해 재일한국인 학자인 이진희가 구육군에 의한 날조설을 주장했지만 일본이나 중국의 학계에서는 인정받지 않았다. 현재도 날조설을 지지하는 한국 학자들이 어느 정도 있을지 모르지만 박노자가 말하듯이 왜인들이 반도에 건너가 백제와 소통하면서 신라를 침략했다는 것이 주류적 해석이다. 구리시의 복제비도 날조설에 따르지 않고 탁본의 비문을 그대로 새긴 다음 옆에 의미불명의 해설판을 세우는데에 그쳤다.

5세기 왜인들은 ‘후진 종족’이었나 [한겨레21 2008/06/0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6&aid=0000017695

광개토대왕릉비 ‘완벽 재현’ [문화일보 2008/05/2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1&aid=0001951113

 반도 남부에 대한 일본의 영향은 삼국사기와 같은 조선사서나 진서, 송서와 같은 중국사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박노자가 쓰듯이 신라도 백제도 왕자를 인질로 일본에 보냈고 특히 전지왕은 왜인 친위대에 도움을 받아 즉위했던 것이 삼국사기에 기록되고 있다. 5 세기 왜왕들은 송에 사절을 보냈고 "사지절 도독 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육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 칭호를 인정받았다. 실태는 불명하지만 중국이 명목상 인정한 것은 왜가 조선반도를 지배했다는 것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박노자는 김해나 고령에 왜의 군사적 거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조선반도 남부에 남는 왜계 유물은 상당히 많지만 그 대표격이 일본식 능묘인 전방후원분이다. 현재 확인되는 전방후원분은 전라도 영산강유역에 한정되고, 가야에 있었다고 여겨지는 임나일본부의 직접적 근거가 안 된다. 그러나 무덤 전체가 일본식인 고분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큰 문화적 영향을 일본에서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일본 내에서는 한국계 유물이 다량 발굴된 반면, 남한 내에서 일본계 유물이 발굴되지 않다"는 임나일본부설 부정의 근거를 위태롭게 한다. 이 때문에 광주광역시 명화동고분의 발견이 일본에서 보도되면 한국정부는 패닉에 빠져 학계는 쉬쉬함에 나섰다. "어느 지역에 전방후원분이 나왔는데 (일본 학자들이 좋아할까봐) 되덮었다"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전방후원분이 많이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사 미스터리]일본식 고분 발굴 관련 韓日 표정 [경향신문 2003/07/2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0025237

'열쇠구멍 무덤' 주인공은 왜(倭)출신 백제 관료 [조선일보 2007/11/16]
http://book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11/17/2007111700293.html

 강인구처럼 전방후원분의 한국원조론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지만 이것이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일본보다 낡은 전방후원분이 반도에서 발견되야 한다. 한국학계가 쉬쉬함 다음에 시도한 것이 전방후원분 날조였다. 2005년 11월에 백제문화연구회는 서울 강동구에서 전방후원분 10여기가 발견되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너무 조잡한 시도였기 때문에 근거가 없는 것이 순식간에 폭로되어 버렸다.

'임나일본부설' 근거여부 밝혀지나; KBS 입수 보도 [마이데일리 2005/11/01]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27860

'강동 전방후원분 발견' 근거없음 판명 [연합뉴스 2005/11/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1138059

 결국 한국학계는 일방적시혜론에서 후퇴해 일본으로부터의 군사적, 문화적 영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의해서 식민지시대의 임나일본부설이 완전 부활한 것은 아니지만, 그 수정판은 언제라도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국사 교과서의 일방적시혜론이 정정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사실보다 반일 이데올로기가 우선"이라는 것이 한국 교육당국의 일관한 자세이기 때문이다.

옛날엔 한국이 일본에 주기만 했다고? [한겨레21 2007/12/1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6&aid=0000016428

전방후원분, 백제-고대日 교류 증거 [아시아투데이 2008/10/01]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169916

 식민사관의 제2는 정체성론으로 19세기말 한국 경제는 일본의 헤이안 시대에 비슷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을 부정하기 위해서 마련된 것이 자본주의맹아론이고 개항 이전에 조선에서 자생적 산업화의 맹아가 순조롭게 자라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이 "오렌지 밭에서 사과를 찾는 부질없는 노력"이고 최근 식민지근대화론에 밀리는 상태인 것은 "일제수탈사관" 항에서 쓰는 바와 같다. 식민지근대화론은 식민지시대 개발을 강조한 것으로 간접적으로 구한말 정체성을 시사한다. 이런 의미로 식민지근대화론을 수정된 정체성론이라고 봐도 무방일 것이다. 또 식민지근대화론이 식민사관인 것도 틀림없다. 왜냐하면 식민사관이란 한국 민족주의자들이 마음 들지 않는 학설을 매도하기 위해 사용될 용어이기 때문이다. 교육당국의 민족주의 성향이 계속하는 한 식민지근대화론이 정통사관이 될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식민사관의 제3는 타율성론으로 조선민족은 자율적인 역사를 이룰 수 없었고 외세에 지배와 영향을 받았다는 주장이다. 특히 조선사 서술이 위만조선이나 한사군과 같은 중국 식민지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타율성의 상징으로 여겨져, 전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서 비난받았다. 한국 교육당국은 "조선인에 의한 조선"인 단군조선을 역사화하기에 필사적이고 그런 노력은 최근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에서는 2007년에 국정교과서의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고 한다"라는 부분을 "삼국유사와 동국통감의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로 수정했다. 이것은 일본 교과서에서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구황후가 조선반도를 정벌했다"라고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반도 청동기 역사 1천년 앞당겨진다 [연합뉴스 2007/02/2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555409

 조선에 대한 확실한 역사기록으로서는 사기에 나타나는 위만조선이 처음이고 그 이전은 선사시대로 간주해야 한다. 천수백년전 일에 언급하는 삼국유사등의 기사는 신뢰할 만한 역사기록이라고 볼 수 없다. 역사적 실재로서의 단군조선에 대한 근거가 삼국유사만으로는 부족한다는 것은 한국에서도 북조선에서도 자각되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1979년에 "환단고기"라는 고서가 "발견"되어 47대 단군들이 2096년간 통치한 단군조선의 역사가 밝혀졌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북조선은 1993년 발굴 조사에서 단군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해서 평양에 단군능을 축조했다. 현재 한국에서 이것들을 믿는 사람이 어느 정도 있을까는 모르지만 YAHOO!KOREA 백과사전의 환단고기 항에서 "학계 일각에서는 이를 위서(僞書)라고 매도하고 있는데, 이런 비뚤어진 인식 태도는 식민사관과 다를 게 없다"라는 글을 보면 의외로 지지자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한국외에서는 말도 안 된 날조라는 평가가 일반적이고 단군조선을 역사적 실재라고 인정할 학자는 거의 없다.

 한국의 국사교과서는 한사군을 가능한 한 무시려는 태도로 낙랑군 이외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그 낙랑군마저 어디에 있었는지 쓰여지지 않다. 놀라운 것은 3 세기 반도 정세를 나타내는 지도에 낙랑군이 없다는 것이다. 평양 지역에 낙랑군을 실으면 민족적 자존심이 다칠지도 모르지만 중국인이 보면 이것은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이와 같이 식민사관이 부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한국내 뿐이고 한국외에서는 그렇지 않다. 한국인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 역사를 수정할 이유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국 교과서에서 한국사가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해서 고대 일본의 문화적 영향이 언급되어 식민지근대화론이 제기된 것이 이상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더이상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역사왜곡"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만두면 좋겠다. 외국인이 보면 식민사관을 극복하려고 하는 한국 민족주의자의 노력들이 훨씬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미국 교과서에 실린 한국 역사 왜곡 자료
http://cafe.naver.com/history1.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44


천황 백제인설


 한국의 야사에서는 일본 천황이 한국계라는 것은 인기 있는 주제이고 특히 고대의 어느 천황이 백제인였다는 설이 많다. 김성호는 오진천황(4세기말)이 비류백제의 왕이였다고 주장했고, 김운회는 근초고왕의 아들이나 처남이었다고 했다. 최재석은 게이타이천황(재위 507-531)이 백제인였다는 설이고, 김용운은 개로왕의 차남 곤지였다는 설이다.

한-일 관계 몸통찾기 내게 맡겨라 [주간동아 2002/01/10]
http://www.donga.com/docs/magazine/weekly_donga/news317/wd317hh020.html

일본, 부여의 아들 [김운회]
http://blog.daum.net/jusen/5280210

현대 일본어는 백제어에서 출발 [조선일보 2009/07/22]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7/21/2009072101636.html

 에가미 나미오의 부여계 정복왕조설도 그렇지만, 문제는 4세기 이후 일본에서 고고학적 단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3세기말 이후 대왕 묘소는 모두 일본 고유 양식인 전방후원분이다. 백제인이나 부여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왔던 정복자가 피정복자의 장례를 따를 이유가 있었을까? 이는 미국 대통령이 원주민 양식의 묘소에 매장되는 것만큼 이상한 것이지 않을까?

 정반후원분 유행이 끝나는 6세기말 이후의 정복자라면 기록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반도에서 정복자가 왔다면 3세기말 이전에나 가능하다. 이 시대 백제도 신라도 통일국가 형성기여서, 가야를 무시하고 일본을 정복하기 위해 왔다고 상상하기 힘들다. 고고학적으로도 일본에서 출토한 4세기 이전 유물들은 가야계통이 대부분이다. 이 때문에 정복자는 가야에서 왔을 것이 가장 가능성이 높다. 이 가야계 집단이 먼저 규슈에서 토착화해서 상당히 일본화한 다음 야마토로 진출하고 천황이 되었다고 생각하면 진무 동정신화와도 부합된다.

 이 시나리오는 한국인들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야사에서 오진 천황과 게이타이 천황이 택해지고 백제인으로 둔갑한 이유는 그들이 새 왕조의 시조였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왕조교체설을 따른다면 비록 초기 천황이 가야계였어도 지금 천황가와는 무관하다는 것이 된다. 한편, 천황가가 만세일계라고 하면 가야계 천황이라는 임나일본부설과 친화성이 높다. 일본서 군사력을 키운 천황가가 고향 땅으로 진출하여 연고권을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이 고고학적 지견을 무시하고 억지로 천황 백제인설을 주장하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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